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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주머니
 

[이종근의 행복산책] 대바람 소리


‘대바람소리 들리더니 소소(蕭蕭)한 대바람 소리 창을 흔들더니 소설(小雪) 지낸 하늘을 눈 머금은 구름이 가고 오는지 미닫이에 가끔 그늘이 진다. 국화 향기 흔들리는 좁은 서실(書室)을 무료히 거닐다 앉았다, 누웠다 잠들다 깨어 보면 그저 그럴 날을 눈에 들어오는 병풍의 낙지론(樂志論)을 읽어도 보고 그렇다! 아무리 쪼들리고 웅숭그릴지언정 ‘어찌 제왕의 문에 듦을 부러워하랴’ 대바람 타고 들려오는 머언 거문고 소리’

신석정시인의 ‘대바람소리’는 살창 너머로 서걱서걱 바람에 댓잎 부대끼는 소리를 그리고 있으면서, 중국 후한 때 중장통이 전원에서 자유롭게 사는 행복을 노래한 ‘낙지론’을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세상 풍경은 전쟁에 패퇴한 군대처럼 어수선하고 인생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덧없지만 저도 ‘낙지론’을 펼쳐놓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라앉습니다. 아무리 쪼들리고 위축되어도 작은 행복에 만족하며 자유롭게 사는 인생을 꿈꿔 봅니다.
비 개인 하늘에 소슬한 바람들어 달빛에 노니는 듯 하루 해 저물어도 봄이면 대바람 소리에 죽순의 꿈이 불쑥불쑥 솟아납니다. 대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청량한 대바람과 댓잎의 사각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기분 또한 상쾌해지곤 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는 풍죽(風竹), 비에 함초롬히 젖은 대나무는 우죽(雨竹), 눈을 머리에 인 대나무는 설죽(雪竹)이다. 어린 대나무는 신죽(新竹) 또는 치죽(稚竹), 늙은 대나무는 통죽이라고 하지요.
저는 종종, 도산서원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낙강에 비치는 달빛을 보고, 대바람에 섞여 오는 소쩍새 소리를 듣고, 퇴계가 밟았던 곳을 골라 디뎌보며, 금방이라도 대바람 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은 소쇄원의 죽림(竹林), 그 옆에 서서 한 점 청정한 고요함과 한가함을 맞이하곤 합니다.
서슬 시퍼런 권력의 칼날에도 무릎 꿇는 비겁한 선택을 하지 않고, 학처럼 고고하게 세속의 모든 그리움, 그 안에 묻어 두고 대잎을 싹틔우며 하루하루를 진지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다짐일 터 입니다.
‘싸아악~ 싸아악’ 선비의 바지런한 발걸음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한데, 소쇄원에서 살다간 양산보의 유훈으로 인해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라”
500여 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건만 학처럼 고고하게 살다간 한 선비의 체취가 여름날에 뿌려지는 소나기처럼 흠뻑 묻어납니다.
이 봄, 대나무를 직접 찾아가렵니다. 건강한 웃음 푸른 대나무에 희망 가득 담고서. 감히 초록 융단을 펼쳐놓은 웃자란 청보리보다 더 시원한 봄기운을 선사하는 게 대나무. 그대여, 바람 부는 대숲에서 귀를 기울이시라.
대나무는 속이 텅빈 것 같으나 실상은 속이 꽉차 실속이 있으며, 갈라질 때는 양단간의 구분만 있을 뿐. 대나무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길쭉하게 솟아 올라 머리 위를 뒤덮고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를 자랑하는 연유입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마구 흔들리지만 부러지지 않는 것은 땅속 깊이 내린 든든한 중심 덕분은 아닐런지요.
옛 이야기에서 비밀을 발설하던 숲이 왜 하필 대나무숲이었을까요. 그건 아마도 대숲이 다른 어떤 숲보다 많은 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일테고, 나이테를 만드는 나무들과 달리 그 속에 아무것도 담지 않는 것 또한 이유일 것입니다.  대나무의 속은 비어 있지만 덧없지 않습니다. 속을 비워놓아야, 버려야 채워지지 않겠습니까. 채워도 채워도 부족한 게 우리의 삶 일찌니. 하지만 위아래로 마디가 있습니다.(竹有上下節)
백낙천은 양죽기(養竹記)를 통해 대나무의 속이 빈 것과 위아래의 마디는 선가의 무심과 절도있는 생활을 나타내면서 ‘대 그림자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일지 않고 달이 물밑을 뚫고 있으나 수면에 흔적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
지조 있는 선비는 풍진세상에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지요. 선비에게 풍진세상이 시련이라면 대나무는 바람입니다. 모진 풍파에 선비가 그렇듯 대나무도 한결같습니다.
전주 경기전 대밭에는 올곧은 선비의 결기같이 솟은 대나무가 봄바람에 흔들리면서 서늘한 소리를 떨굽니다. 밤이면 태조로의 밤을 수놓는 청사초롱 하나둘씩 불을 밝혀 반짝반짝. 댓잎 사이로 산산이 부서지는 아침 햇살이 오늘따라 눈이 부실 정도로 황홀한 내 심사.
‘한 병의 술을 가지고 꽃밭에 들어가/친구 한 명 없이 술을 마실 때 잔을 들어 저 달을 맞이하니/그림자 대하여 세 사람 되었구나/ 달은 술을 마실 줄 모르고 나만 취하였네....'
소쇄원 담벽, 흰 바탕에 여덟 자의 ‘소쇄처사 양공지려(瀟灑處士 梁公之廬)’라는 검정 글씨는 ‘회사후소(繪事後素)’ 즉,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한다’는 공자의 말을 현실화한 징표를 떠올리게 하나니. 기본이 없으면 제아무리 재주를 부려보아도 사상누각이 되기 쉬운 만큼 본질 또는 밑바탕을 청아하게 하라고 하니, 숱한 인고의 시간은 거센 비, 바람과 싸우며 끝내 소중한 대나무로 다가섭니다.
색즉시공. 낮은 저음으로 지옥 중생에게 까지 부처의 법음(法音)을 전해준다는 범종 소리는 가슴 밑 바닥 무뎌진 감수성을 적시는 단비요, 메마른 내 가슴에 꽃비가 됩니다.
그대여! 너무 무겁지 않은가요, 탐욕과 성내며 사는 인생길이여. 만행(卍行). 후드득! 산사의 바람이 연주하는 풍경 소리에 꾸벅꾸벅. 그 소리, ‘땡그렁 땡그렁’ 여울져 사바의 세계에 그윽히 울려 퍼집니다.
푸른 댓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은 에메랄드빛처럼 참으로 곱기만 합니다. 대나무의 꽃, 나는 지금 일상에 지쳐있는 당신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희망이 우후죽순처럼 아주 크게 ‘쭉쭉(竹竹)’ 반듯반듯하게 커 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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